고독한 러너
젊은 친구들은 러닝크루의 멤버가 되어 뛰는 경우가 많지만, 중년의 내가 그들과 합류한다는 건(끼워줄 리도 없겠지만) 민폐일 거다. 애초에(그리고 앞으로 평생) 러닝크루에 조인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젊은이와 나이든 이가 서로 소통한다는 것과, 신체적 정신적 차이를 무시하고 같아지려 한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내 나이대의 러너들을 모아 함께 뛸 생각도 없다. 서로 일정을 맞추느라 구속될 것이고, 운동을 마치면 술 한 잔 하자는 소리들이 들려 올 것이고, 서로 페이스 뿐만 아니라 마음을 맞추느라 고생할 것이다. 원치 않는다. 나의 러닝은 그래서 고독할 것이고, 아내와 뛰고 있지만 영원히 우리 둘만의 레이스가 될 것이다. 입시가 끝나고 혹시라도 한 번쯤 아들들과 함께 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지만, 뭔가 피하거나 도망칠 일이 생긴다면 그 때나 함께 뛰게 될까.... 아이들이 행여 나이든 부모와 같이 뛰려 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공원의 고독한 러너들
공원에서 뛰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혼자다. 뛰기 좋은 공원이기 때문에 당연히 시간과 날짜에 관계 없이 많은 러닝크루도 볼 수 있다. 크루 활동은 아니지만 두 명 혹은 세 명 정도의 친구들이 같이 뛰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대부분은 소속 없이, 친구 없이, 가족 없이 고독하게 러닝한다. 혼자 뛰지만 그들의 시간이 충만할 것이라는 것을, 실제로 뛰어 보면서 알았다. 무리들과 섞여 있어도 고독할 수 있고, 혼자 있어도 충만할 수 있다. 달리기를 해 본 사람이라면 알 텐데(러닝 초보가 이런 말을 해도 미안하긴 하다.), 뛴다는 것은 끝없는 역동성 속에서도 어떤... 독립적인 중심 같은 것을 유지하는 일이다. 달리기를 미분해보는 일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아무튼 혼자 뛰는 것은 나름 멋진 일이고, 온전히 혼자가 될 수 있어서 오히려 충실하다. 공원에는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하고, 자신과의 싸움에 몰두하고 있는 고독한 러너들이 넘쳐 난다.
저녁의 러닝크루
처음 한 달 정도는 주로 저녁에만 뛰었다. 아침에 뛰는 경우는 주말 정도였는데, 저녁이 되면 다시 공원에 나오고 싶어졌다. "당신은 주로 어느 시간대에 러닝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아주 쉽게 "저녁에"라고 대답할 수 있던 시기였다. 대략 9시에서 12시 사이에 뛰었다고 할 수 있는데, 뛰는 시간이 일정 범위 안에 있다 보니 어제 본 사람을 오늘도 보고, 그 다음날도 보게 되는 식으로 낯이 익어 가는 러너들이 있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공원인데다가 한국 사람들이 낯선 사람과 인사를 트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인사하는 사이로 발전한 것은 아니지만, "함께 뛰고 있다"는 생각을 가져도 좋을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마음 속의 러닝크루"라고 이름지었다.
그들 중 기억 나는 저녁의 러너들로는...
- 60대는 확실히 넘어 보이고 아마 70 가까이 되신 아주머니 러너. 마트에 갈 때 입으실 것 같은 일상복을 입고서, 나보다 더 잘 달리신다.
- 가을쯤에는 마라톤에 참가하실 것 같은, 수십 바퀴를 가볍게 뛰시는 아저씨. 최소한 지역대표 수준의 포스가 느껴진다.
- 작은 운동용 크로스백을 메고, 태껸 발차기를 하듯이, 거의 지면을 스치듯 낮게(?), 무릎 아래로만 뛰는 것 같은 청년. 속도가 꽤 빠르다.
- 아내와 내가 함께 감탄해마지 않았던, 선수급의 몸매와 주력을 가진 (30대?)여성분. 우리는 그녀를 "이 구역 러너"라면 저 분, 이라고 평가했다.
- 가끔씩 내용을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달리는, 자폐증을 가진(것으로 보이는) 청년 등.
새벽의 또 다른 크루들
새벽은 역시나 시니어 분들의 무대다. 공원에 있는 사람들의 평균연령은 새벽만 되면 65세 정도는 될 것처럼 사방이 온통 시니어 분들이다. 걷는 분들이나 산책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이 시간에는 모여서 운동하시는 그룹이 네다섯 개는 된다. 태극권, 몸을 두드리면서 체조하는 그룹 등 여러 그룹이 있다.
- 그 중에 가장 많은 크루를 자랑하는 것이 '맷돌체조' 크루들. 흙바닥 운동장에 모여서 팝송, 트로트, 가요, 민요 할 것 없이 (이름 붙이자면) '맷돌체조 플레이리스트'를 틀어 놓고 신나게, 춤추듯 운동하시는 분들이다. 달리는 분들은 아니지만 이 분들도 내 마음 속의 '크루'다.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면 어찌나 신나는지 당장 뛰어 가서 합류하고 싶을 정도. 맷돌크루 중 몇 분은 맷돌저지를 입고 트랙을 몇 바퀴 걷고 가시기도 한다.
- 새벽은 아니지만 주말아침반쯤 되는 키 큰 외국인. 키가 2미터가 넘을 것 같은데 약간 겸손한 자세(?)로 매우 천천히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러닝한다. 우리는 트랙을 도는 사람과 같은 방향, 시계 반대방향으로 돈다면, 이 서양인은 시계방향으로 돌아서 하루에도 서너 번은 마주친다. 아내가 눈을 맞추며 목례를 하기도 했지만 이 양반은 주변사람에게 눈길을 전혀 안 주고 겸손하게 달린다.
- 그 외에 아침 시간대에 공원 입구를 왔다갔다 하시는 야쿠르트 아주머니가 있는데, 공원 입구 정중앙에 계실 때가 잦아서 우리는 그 분을 "센터장님"이라고 부른다.
- 입구 모퉁이에는 맷돌손두부 등 각종 반찬과 떡, 식혜 등 마트급의 아이템을 갖춘 트럭이 반짝장사를 한다. 운동을 마친 어르신들이 여기서 반찬거리와 일용할 양식을 사 가신다.
공원 옆에 산 지 10년이 넘었는데 이제야 공원을 다시 보고 있다.
달리기를 하면서 이제야 내 호흡과 근육과 걷거나 뛰는 방식을 다시 보고 있다.
새롭다.
'그렇게 러너가 되어 간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러닝 다이어리] 하이힐 러닝 (0) | 2023.09.22 |
---|---|
[러닝 다이어리] 맞아요, 달리기는 겁나는 운동이죠 (2) | 2023.09.18 |
[러닝 다이어리] 28도 날씨에 뛰면 죽는 줄 알았다 (0) | 2023.09.05 |
[러닝 다이어리] 그렇게 나의 러닝은 시작되었다 (5) | 2023.09.04 |
[러닝 다이어리] 트랙 밖은 위험해! (0) | 2023.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