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31일, 폭염
7월 말일. 아내가 날씨를 캡처해서 보냈다. 밤 12시가 돼도 27도. 우리가 보통 걷기와 뛰기를 위해 공원에 나가는 시간대가 9시~12시 사이니까, 28도쯤 된다는 것이고, 이런 가혹한 날씨에 뛸 수는 없지 않겠냐는 뜻. 이 때까지만 해도 28도에서 뛰면 죽는 줄 알았다. 일상생활을 하기에도 힘든 폭염이 계속되고 있어서 러닝은 일종의 자살행위 같이 생각되었던 것이다. 모두 재난상황에 처해서, 끓는 물에 들어 갔다가 나온 시금치처럼 시들시들하게 살아가던 기간이었다. (공원 바로 옆에 소방서와 병원이 있어서 쓰러져도 살 수는 있겠지? 뭐 이런 설레발을 치기도 했다.)
가능하면 뛰고, 불가능하다고 해도 하루 1만보 걷기는 채우자는 것이 이 때의 운동목표였다. 이 날은 그래서 '실내걷기'로 가닥을 잡았다. 트레드밀이 있지는 않았고, 가끔은 집안을 무한 반복해서 왔다갔다 하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할 때가 있었는데 이 날도 그렇게 만보를 채우려는 계산이었다. 오늘(9월 5일)도 꽤 더운 날씨지만, 7월말은 폭염이 계속되고 있었고, 그런 날씨가 달리기를 본격적으로 해보려는 우리의 일정에 약간의 차질을 주던 때였다.
두려웠던 건 폭염이 아니라 달리기 그 자체
다만 이런 '차질'은 단 며칠을 가지 못 했는데, 이상한 욕심이 마구 생겨나서 기어이 밖에서 뛰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러닝 아니면 죽음을! 뭐 이런 크레이지한 마음이 된 것인데, 그건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더위탓인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7월 31일에 느꼈던 두려움의 대상은 어쩌면 더위가 아니라 뛰는 것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싶다. 28도든 18도든 상관 없이, 뛰는 것 자체가 죽을 것 같았던 러닝초보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페이스를 조절하면서 어떻게든 3킬로미터 정도는 채울만큼 익숙해지기도 했고, 더위도 가셨고, 루틴의 즐거움에 동반한 어떤 포기(뛰지 않으면 어쩌려고?)도 일상적이 되어서 "28도에 뛰는게 뭐가 문제지?"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때는 그랬다.
격리 호텔에서의 2주간 매일 만보 걷기
실내 걷기로 만보를 채운 얘기를 하는 마당이라 말인데, 코로나 1년차(2020년)에 베트남의 격리 호텔에서도 2주간 매일 만보를 걸었던 적도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거의 반 년을 기다리다가 강행 결정이 내려진 베트남 촬영. 대행사 사람들과 프러덕션 사람들 모두 베트남 입국 시 2주 격리, 일주일 간 촬영, 다시 한국에 들어 오면서 2주 격리를 감수한, 무모한 프로젝트였다. 코로나 때문에 세상이 미쳐 있었고, 우리는 더 미쳤던 것 같다.
격리는 하롱베이 노보텔에서 이루어졌다. 방은 1인 1실. 방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었는데 내가 배정된 방은 별도의 룸에 욕조까지 있었고 문에서 발코니까지 길이가 6미터가 넘을 것처럼 긴 모양의 방이었다. 앞으로 할 일은 오직 하나.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객실 앞에 하나씩 마련된 의자에 하루 세 번 호텔 도시락이 놓여졌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 호텔방 안에서 식사를 한 후 다시 의자에 내놓았다. 발코니가 있어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고, 재떨이를 치워주는 것을 포함해서 객실 메이크업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 들어 보니 호텔직원들도 우리와 같이 2주간 함께 격리하고 있다고 했다. 유니폼 대신에 방역복을 입은 상태로 도시락을 나르고, 메이크업을 하고, 방 사이에서 일종의 물물교환 심부름도 해주었다. 심지어 룸서비스도 정상적으로 이뤄져서, 제육볶음과 함께 한국 소주를 시켜 먹거나 다른 방으로 안주와 술을 쏠 수도 있었다. 입소한지 하루쯤 지났을 때부터 모든 룸서비스가 가능하다는 소문이 카톡 단체방에 알려져서, 모두들 아침을 먹고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배달해서 먹었다. 오직 하나. 방에서 나오지 말라,는 규칙만 지키면 됐다.
끼니와 끼니 사이, 저녁을 먹고 나서 다음날 아침 조식을 배달받을 때까지는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심심함에 대처해야 했다. 나는 걷기를 택했다. 2주간의 격리 기간 동안 나는 매일 호텔방 안에서 1만보를 걸었다. 문에서 발코니까지를 무한 왕복. 속도라도 낼라치면 다섯 걸음을 걷고 돌아서고, 다시 다섯걸음을 걷고 돌아서느라 약간 어지러울 정도의 루트였다. 아무튼 나는 쉼없이 걸었다.
복수를 꿈꾸며 감옥의 독방에서 체력을 단련하는 것 같았던 경험을 통해서, 몇 평의 공간만 있어도 걷기는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풍경이 바뀌지 않는 트랙을 몇 바퀴씩 도는 것도 그렇고, 단순한 호흡과 반복되는 움직임으로 구성된 달리기 자체도 그렇고, 단순한 움직임을 견디거나 심지어 즐길 마음이 없으면 걷기나 달리기는 영 재미 없는 일일 것이다.
호텔의 작은 객실에서도 만보를 걸을 수 있다면, 세상에 길이란 것이 없어도 걷기나 달리기는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달리기가 그리 거창한 운동도 복잡한 운동도 아니지만, 오히려 그래서 가장 순수하게, 가장 단순하게 '멈추지 않고 계속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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