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D-250
내가 처한 상황
간단하게 내가 처한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 한 달 전에 덜컥 인천-파리 왕복 티켓을 끊었다.
- 2025년 4월 후반의 어느 토요일 출발한다. 아내와 함께.
- 산티아고 순례길 중 프랑스길을 걷기로 한다. 첫 번째니까.
- 40일 후, 5월의 마지막날 한국행 복편을 탄다.
다시, 처한 상황
흠...
이런 걸 '처한 상황'이라고 하기엔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
예를 들어,
- 19세인 두 아들에게, 부모 없이 단 둘이 남아 '책임회피성 상호신뢰'를 키워가며 집을 폐가로 만들기에 40일은 너무 충분한 시간 아닌가, 싶어졌다.
- 평생의 꿈이라며 은근히 내 등을 떠밀던 아내가 요 며칠 '내가 잘 걸을 수 있을까?'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몸무게의 10% 정도가 적당하다는 배낭의 무게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큰 게 올지도 모르겠다.
- 여유자금이 고갈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소 키우기를 중단하고도 한 달여의 여행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을까? 빛이 아니라 빚을 향한 순례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들이 진짜 '처한 상황'이라면 상황일 것이리라.
아니, 다시. 진짜로 내가 처한 상황...
"걷게 되었다"
내가 처한 상황은 심플하다.
나는 지도에 표시된 저 길을 두 발로 '걷게 되었다'.
그것이 아내의 버킷리스트여서가 아니라,
그래서 언제부턴가 내가 어떤 숙명처럼 여기게 되어서가 아니라,
항공권에 찍힌 시간에 맞춰 어김 없이 공항에 나타나
프랑스-스페인에서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고,
그 보다는 '어떻게든 산티아고에 가 닿고'
40일 후에 다시 인천행 비행기를 타러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나와 내 아내 인생의 40일이 예약 및 확정되었다.